꿈꾸는 도시
도시는 꿈을 꾼다. 영화는 도시가 꾸는 꿈이다. 우리는 그 꿈속에 때로는 희망을 때로는 절망을 굴절시킨다. 때로 영화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다. 감독들은 스크린 속에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지독한’ 현실을 투영시킨다. 영화에 있어 공간은 영화의 배경이자 동시에 그 자체가 주요한 상징으로 그려진다.
<식스 센스> <언브레이커블>을 연출한 M.나이트 샤말란 감독은 영화 촬영지로 자신이 태어나 지금껏 살고 있는 필라델피아를 고집한다. 그것은 필라델피아라는 도시가 갖는 풍경과 그 속에 담긴 인생살이가 감독이 그리고자 하는 영화적 요소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식스 센스>에서 감독은 유서깊은 이 도시의 음산한 거리들, 낡은 집, 싸늘한 공기에 집중했다.
물론 감독이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 무엇을 그리고 무엇을 읽느냐는 순전히 그에게 달린 문제다. 부산 곳곳에서 배어나는 항구도시의 정서를 읽을 줄 아는 곽경택 감독은 한국적 느와르라 할 수 있는 영화 <친구>를 이 도시 부산에서 탄생시켰다.
 

부산은 바다다
부산은 항구도시다. 그전에 바다의 도시다. 해운대에서 이른 아침, 용솟음치는 일출을 가슴에 품었다면 저녁나절에는 다대포에서 해거름의 허(虛)한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 강수연이 열연한 영화 <지독한 사랑>의 세트장이 설치되었던 곳이 바로 다대포다. 관광명소로 오랜 명성을 끼고있는 해운대나 다대포야 이름만 대면 누구라도 알만한 바다다.
하지만 작은 포구 청사포를 기억하는 이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더군다나 특급호텔들이 즐비한 해운대에서 자동차로 5분만에 닿을 수 있는 곳에 이런 작은 포구가 숨어있다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않는다. 해운대가 화려하고 정열적인 도시의 바다라면 바로 옆에 터잡은 청사포는 갯내음이 물씬 묻어나는 삶의 공간이다.
 

망부송에 얽힌 전설을 따라
청사포는 해운대와 송정 사이에 있는 포구다. 해운대에서 송정 방면으로 해안도로를 타고 가다 달맞이언덕을 넘으면 바로 '청사포' 안내표지가 있다. 청사포로 내려가는 길은 지금도 자동차 두 대가 겨우 교차해 지날 수 있을 정도로 좁다.
갯바위로 된 해안에 수려한 모래가 펼쳐지고 뒤로는 소나무가 숲을 이룬다. 청사포 앞바다에서 잡히는 생선은 예로부터 맛이 좋기로 이름나 있고 이 때문에 부산횟집, 소나무횟집, 울산횟집 등의 간판을 내건 횟집들이 2킬로미터도 채 안되는 해안에 줄을 잇고 있다.
바닷물이 유난히 맑아 모래가 푸르다고 하여 모래 사(砂)자를 써 청사포(靑砂浦)라 이르지만 이전에는 뱀 사(蛇)자를 넣어 청사포(靑蛇浦)라 불렀다는데 여기에는 한 여인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내용은 이렇다. 청사포에 금술 좋은 젊은 부부가 살았는데 부인은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가 돌아올 무렵이면 언제나 소나무 앞 바위에서 남편을 기다렸다. 하루는 어쩐 일인지 시간이 지나도록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득하게 먼바다를 바라보며 남편을 기다렸지만 해난사고를 당한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이미 이승사람이 아닌 남편이 용궁으로 가서 이승을 바라보니 아내가 바닷가 소나무에 올라 하염없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더란 것이다. 가슴이 저미는 안타까움에 남편은 용왕님께 하소연을 하였고 용왕은 부부의 정성을 가상히 여겨 푸른 뱀(靑蛇)을 이승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부인은 용궁에서 보낸 청사를 타고 용궁의 남편을 만나 부부의 정을 다시 이어갔다고 한다. 부인이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면서 바다를 바라보던 소나무를 망부송이라 불렀는데 지금도 그 소나무가 바닷가에 자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사당을 지어 외롭게 죽어간 부부의 혼을 위로하고 해마다 마을의 안녕과 풍어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시간이 교차하는 곳에서
부산은 뒤섞인 시간의 공간이다. 어떤 이는 부산을 두고 ‘시간의 백화점’이라고도 했다. 그렇게보면 청사포는 작은 시간의 백화점이다. 5분 거리에 4만 가구의 아파트가 들어선 신시가지가 형성되어 있고 부산의 베버리힐즈라는 달맞이언덕에는 최고급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스포츠카를 탄 드라이버족들이 고속으로 질주하는 바로 그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시간이 멈춘 듯이 고즈넉한 마을이 청사포다. 자본의 유입에 의해 무섭게 커가는 도시를 등에 업고도, 사람들의 풋풋한 인심이 바닷바람을 견디기 위해 지붕에 얹은 폐타이어처럼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동해남부선을 따라 부산역을 출발한 기차가 가끔씩 기적을 울리며 울산으로 내닿는다.
청사포는 영화 세트장이 아니다. 도시 한가운데서 바다를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다. 그들은 영화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무심히 하루를 살아간다.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이유로 그들의 모습은 더욱 영화적이다.
도시 속에서 영화는 만들어지고, 도시와 도시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과거와 현재는 스크린 속에서 새로운 이미지로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도시인들은 이곳 청사포에서 잊었던 추억을 꺼집어내고 이제는 아스라한 고향을 떠올릴 지도 모를 일이다. 삶을 껴안고 있는 바다의 진한 냄새가 스민 이 포구에서 우리는 적어도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동시에 포착할 수 있다. 스크린 속에서 청사포가 어떤 모습으로 그려질지라도....

 
TIP
청사포에서 북쪽으로 차머리를 돌려 송정해수욕장을 지나 해안도로를 달리다보면 국립 수산진흥원입구 못미친 곳에서 ‘해동용궁사’라는 절을 발견하게 된다. 기장읍 시랑리의 용궁사는 해변가 절벽에 우뚝 선 사찰로 108계단을 걸어 내려가면서 지나게 되는 사찰 입구의 절벽위 돌다리는 신기하기만 하다. 용궁사는 그 풍광이 뛰어나서 구도의 도량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관광명소로 이름을 얻고 있는 곳으로 올해는 이곳에서 영화 <폰>을 찍기도 했다. 서암포구를 뒤로 하고 기장읍 방면으로 계속 올라가면 멸치잡이 배가 많이 들어오는 항구 대변항이 있다. 해안을 따라 횟집들과 노점상들이 줄지어있고 시간을 잘 맞추면 멸치잡는 그물인 후리를 터는 명장면을 볼 수도 있다. 대변의 멸치회는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일품으로 멸치철이 되면 전국의 미식가들로 붐빈다. 무, 깻잎, 미나리 양배추, 채썬 배, 사과 등을 넣고 고추장 양념으로 버무려 먹는 멸치무침도 일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