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rlovy Vary International Film Festival 이상용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잡다한 것들을 상상하게 하는 ‘영화라는 프리즘’
올해 두 번째로 카를로비바리 영화제 참가를 준비하면서 지난해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이 글을 쓴다.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이 조금 넘는 거리에 위치한 카를로비바리(Karlovy Vary)는 곳곳에 온천수가 흘러나올 정도로 유명한 휴양지로 알려 져 있다. 이곳에서 동유럽의 관문(체코의 역할이 역사적으로 그러 하기도 했다.) 역할을 해온 카를로비바리 영화제가 지난해 46회를 맞이했었다. 46회라는 이름에 걸맞게 개막식 장에서 본 각양각색의 트레일러가 눈을 치켜 뜨게 만들었다. 카를로비바리의 트로피는 ‘ 아카데미 영화제와 매우 흡사한 오스카 트로피와 닮은꼴인데，각 각의 트레일러는 공로상 수상자들이 직접 출연하여 짧은 영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간단하게，설명하자면 공로상으로 수여 받은 트로피로 무엇을 할까? 라는것이 주제였다.

〈아마데우스〉의 감독(그는 체코 출신의 감독이기도 하다)인 밀로스 포먼은 트로피로 자신의 알약을 가루약으로 바꾸는데 활용한다. 트로피를 쾅쾅 내리친 후 가루약을 입가에 범벅이 되도록 먹는 장면은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주드 로(배우)가 등장하는 것인지 다른 배우였는지 기억이불문명 하지만 트로피를 보더니 수정구슬 부분을 빼 버리고 자동차 앞머리 장식으로 쓰는 아이디어도 돋보였다. 또 누군가가 등장하는 트레일러에서는 잠긴 문을 부수는 망치를 대신해 쓴다. 한국 같으면 트로피에 대한존경심이 없다고 배격할지 모르겠으나 유머를 사랑하는 이곳에서는 트로피를 온갖 소도구로 뒤바꾼다. 트로피의 수정 부분으로 하녀의 몸을 훔쳐보는 트레일러까지 있었으니，공로상을 수상한 이들에게 카를로비바리의 트로피는 잡다한 것들을 상상하게 하는 ‘영화라는 프리즘이었던 셈이다.
 

동유럽의 관문인 만큼 폴란드，헝가리，러시아 등지에서 온 감독과 프로듀서를 자연스럽게 만날 수가 있고, 매일 저녁 각종 기관과 영화사에서 주최하는 파티가 열린다. 게스트의 입장에서 본 카를로비바리영화제의 하루는 오전 8시 반에 열리는 주요 경쟁부문의 프레스 시사를 시작으로，쉼 없이 프레스와 인더스트리를 위한 상영 시간표가 한 축을 차지하고 있고，관객들은 줄을 서서 부지런히 주요 상영작 들과 특별 상영작들을 관람한다. 관객들과 함께 보기 위해서는 배지로 티켓을 예매해야 한다.
 

부산과 닮은, 이방인을 위한 배려가 있는 소통의 영화제
칸의 압축판 같지만，관객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경쟁 영화제라기 보다는 경쟁부문이 있고(하지만 여기에 포함된 영화들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함께 있는 여러모로 부산과 닮은 영화제였다. 영화와 영화 사이로 잠시의 시간이 생기면 작은 물길을 따라 중심가를 걸어 보기도 한다. 작은 하천위로 세워져 있는대 형 영화포스터들이 눈길을 끄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를 지켜보면서 우리도 해운대 바다 위에 포스터를 세우면 재미있을까라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길을 걷는 도중 <아리랑〉으로 찾아온 김기덕 감독을 만나기도 했고, 인더스트리를 위한 모임 장소에서 만나기로 한 폴란드 영진위 담당자인 마리아를 찾아 해매기도 했다. 그래도 초대받은 파티나 약속은 매번 구글맵을 통해 확인 한 후 걸어가볼 수 있는 거리였으니 많은 것이 집중되어 있는 영화제라고 할 수 있다. 메인상영관을 중심으로 한 호텔 건물 안에는 무선 환경이 좋았던 탓에 메일을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고，변경하는 데는 편리했던 기억이 난다. 최근에 느끼는 것이지만 독일에 있을 때는 무선 인터넷을 무료로 활용할 수 있는 경우가 제한적이고, 유료는 통상 하루에 이십 유로 가까이 지불해야 했는데，5월 초에 다녀온 폴란드 그디니아 지역도 그렇고(그단스크 지역에 속해있는 이곳은 유로 2012가 열리는 탓에 북적거릴 거라고 짐작이 된다.)，카룰로비바리의 많은 장소들도 편안하게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가 있다.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차이가 매우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부산이 무선 환경을 좀 더 확충해야 하는 이유도 자국인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이방인들을 위한 배려와 서비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영화반 사람반’의 카를로비바리，그리고 프로그래머
영화제의 환경 이야기는 이쯤 하기로 하고, 몇 편의 상영작을 떠올려 본다. 부산에서도 상영했던〈집시〉는 꽤나 오이디푸스적인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집시가 유랑하는 이곳에서는 현실감을 지닌 한 가족의 이야기였다. 이 작품은 예상대로 대상을 수상했다. 이곳에서 만난 독일 여성감독의 초청으로 젊고 발랄한 독일 십대 소녀들의 영화를 메인 상영관 한 가운데 자리에서 보기도 했는데 이 상황까지는 좋았지만 영화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올해도 그러하지만 체코로 넘어 오기 전 독일에서 대략60편이 넘는 영화를 보고 오는 탓에 예민한 촉수가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을 환하게 웃고 있지만 (속은 어떻게 잘 거절해야 하나라고나 할까)，웃을 수만은 없는 결과가 일어나기도 한다. 폴란드 영화특별전에 상영된 몇몇 작품들은 올해 그디니아에서 본 영화와 비교해 보자면，아쉬웠다는 생각이 확연하게 들고，러시아 감독으로부터 DVD를 받았던 기억이 난다. 러시아에서 이름을 날린 베스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였는데，생각만큼 흥미진진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도 만나자는 메일들이 날라 오는 걸 보니 내게 카를로비바리는 ‘영화 반 사람 반’ 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올해 칸에서 만난 체코 프로듀서가 자신의 준비 중인 작품을 설명해 준다고 하니 카를로비바리에서 보기는 어렵겠지만 인연이 닿는다면 흥미로운 체코 영화 한 편을 부산에서 상영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프로그래머의 일은 때로는 고고학자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무언가를 찾아 다니다 뜻밖의 발굴을 하기도 한다. 아니 고고한 고고학자 이기보다는，20키로그램짜리 가방을 들고 다니는 세일즈맨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구역은 동유럽이고，카를로비바리는 구매할 영화를 살피고，이따금 한국 영화에 대한 것도 몇 마디 해주는 곳이기도 한 셈이다. 너무 낭만이 없는 말이었나? 그렇다고 해도，좋은 영화를 만나면 눈이 번쩍 하는 것은 본능인지도 모르겠다. 매 번 길을 나설 때마다 기대감이 드는 것은 눈을 번쩍하게 해 줄 영화들이 아무도 모르게 웅크려서 기다려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