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덕밥과 물회

임장섭 오딧세이치과 대표 원장

지난 8월，광복절을 낀 여름휴가 어느 날의 일이었다. 몇 십 년만의 기록적인 더위 네 열대야가 열흘 이상 되었네... 하는 그딴 빨간 소식 들 말고.
 

오후 2시가 조금 지났을까? 오랜만에 하는 바깥 구경이 재밌었다. 작렬하는 태양 볕과 이글거리는 아스팔트의 지열도 따끈따끈 나름대로 좋았고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려는 착한(?) 사람들과 더불어 손부채를 만들어 팔랑거리는 학생들을 쳐다보며 저러면 과연 열기를 식혀 줄까 아님 더 더울까?’ 궁금하기도 했다. 제일 신기했던 건 평소에는 늘 병원 안에서 엄마표 도시락을 먹는 지라 대낮의 이 시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한다는 것을 전혀 몰랐던 나였다.
 

그래 세상엔 참 많은 사람들이 사는구나，저마다의 모습으로 각자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며?(...균균)’ 점심 때를 지나 인파 속을 하릴없이 어슬렁거리던 나는 슬슬 배가 고파 길가의 식당엘 들어 갔다. 차림표 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물회와 회덮밥이 적혔다. 월로 하지? 물회는 밥이 없는 게 맞지? 그건 너무 심심 한데? 역시 끝에는 깔끔하게 맨밥으로 마무리가 되어야제 맛인데，회덮밥은밥에다 달랑 생선회 몇 토막 덮어서 위장한 거? 뜨뜻한 밥에 얹혀 생선회 식감이 별론데...월로 할까? 아 ~ 어려워...사람들은 뭘 먹나?' 이리 저리 둘러 보았으나 늦은 시간이라 식당 안엔 손님 이 없다. 아 고민이네...한참을 고심 하다가 막 물회로 주문을 했던 참이었다. 70대 초반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식당을 들어 섰다.
 

중키의 할아버지는 하얀 중절모를 눌러 쓴 데다 깨끗하고 정갈하게 다려 입은 위아래 하얀 삼베 옷에 검정 구두와 대님까지 멋지게 차려 입으셨다. 할머니는 키가 작고， 꽃무늬가 화려한 반팔 셔츠에 흔히 보는 회색의 혈렁한 바지와 운동화 차림이었다. 양산을 접고 식당을 들어서면서부터 에어컨바람이 어디가 시원한지 이리저리 손을 휘저어보며 자리를 잡고 앉으면 서도 할머니는 연신 뭐라고 할아버지한테 얘기를 건네는 중이었다. 할아버지는 빙긋이 웃으시며 듣는 둥 마는 둥 전혀 대꾸가 없다

할머니는 식당 한 켠에 서 있던 선풍기를 끌어다 할아버지 의자 옆에 가져 다 놓고 자그마한 만물상-할머니표 손가방에서 가제수건을 꺼내 냉수에 적셔 할아버지한테 건넨다. 할아버지는 또 그저 묵묵히 받아 들고 목덜미의 땀을 훔친다 그 사이 주문표를 펼쳐 든 할머니는 별 고민도 없다. 단박에 물회와 회덮밥을 하나씩 시킨다. 까~ 저거였다. 그래서 밥은 두 사람이 같이 먹는 거라는구만...히 노부부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대각선 식탁에 앉았는데 등을 보인 할아버지는 속이 훤히 비치는 삼베 옷 아래로 역시 깨끗하게 손질 한 하얀 내의를 갖춰 입으셨다.

할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은 할머니는 어느 틈엔가 손가방에서 부채를 꺼내 들고 딱히 할아버지한테 하는 것도 아닌，그렇다고 달리 들을 사람도 없는，동네 누구 집에 머시기가 장가를 갔다더라누구집에는 새 냉장고를 사왔는데 선풍기가 따라 왔다 더라 쉴새 없이 뭐라 뭐라 중얼거리며 할아버지한테 연신 부채 질을 해 댄다. 할아버지는 또 그저 빙긋이 웃으시며 아무런 대꾸 없이 듣고만 앉았다 이윽고 주문한 물회가 나오자 얼른 그릇을 할아버지 앞에다 밀어 놓으며 ‘물회는 물 붓지 말고 얼음 녹이며 천천히 잡솨” 하고는 함께 나온 반찬 그릇도 죄 할아버지 앞에다 끌어 다 할아버지 얼굴표정은 아마 평생을 그리 사신 듯 빙긋이 웃으시는 채로 굳은 듯하다. 식당 주인한테도 역시 같은 표정으로 모자를 눌러 쓰며 값을 치르고 나자 곁에 섰던 할머니가 “길에 나서면 또 덥니 더’’하고는 급하게 양산을 펼쳐 들고 식당 문을 나서서 할아버지를 모셨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아무 말 없이 뒷짐을 진 채로 할머니를 따라 나섰고 할머니는 또 뭐라 얘기를 시작하셨고，그들은 그렇게 한여름의 뜨거운 태양 볕 아래로 걸어 나갔다.

다시 한적해진 식당에 홀로 앉아 나는 할머니의 일생을 생각해 보았다. 할머니는 행복했을까? 할머니의 어렸을 때 꿈은 무엇 이었을까?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사랑했을까? 젊어서 한 사람을 만나 평생을 같이 살면서 자신보다는 그 사람을 위한 삶에 후회는 없었을까? 자신의 삶이 그리 될 줄을 미리 알았을까? 딸을 낳아 기르고 결혼시켜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잠깐 어느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내”가 모라비안파의 혼인은 제비를 뽑아서 결정한다고 하는 풍문이 있는데 사실이냐고 물었다 제비를 뽑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만 하는 것이고，청년이 결혼할 의사가 있을 때는 자기 반의 연장자에게 그 얘기를 한다고 했다. 그러면 그들은 젊은 여자들을 감독하고 있는 나이 든 여자들과 의논한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각기 그 감독하고 있는 젊은 사람들의 성격과 기질을 잘 알고 있으므로 누구와 누구를 결혼시키는 것이 좋을지 가장 잘 판단할 수가 있다고 하며，대개 그 판단은 동의를 얻는다고 하였다. 하지만 예를 들어 한 청년에게 비슷한 정도로 적당하다고 인정되는 처녀가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 있을 때에는 제비 뽑기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결혼이 본인들 쌍방의 의사에 의해 선택 되지 않고 이루어지는 경우 당사자들에게 대단히 불행한 결과가 초래될지 도 모른다고’’내’가 말하자 이 이야기를 들려 준 그 사람이 대답했다. ’아니 지요，본인들 이 좋다고 해서 결혼한 경우에도 불행한 일은 생깁니다."

여기서 “나”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자민 플랭클린이다. 그의 자서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니 이는 믿을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1790년에 씌어진 책이라 너무 옛날 이야기인가? 자신을 잘 아는 선배들이 정해주는 짝과 결혼(사랑)을 하는 것은 너무 나도 어리석은 구시대의 유물인가? 그럼 세상이 바뀐 2012년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결혼(사랑)은 인종과 국적마저도 초월하는 무제한의 선택이 보장(?)되는 자유연애는 차치하고 서라도, 소위 결혼 정보회사를 통한 초과학적인 결혼은 수 천명 미혼 남녀들의 자세한 신상-키, 몸무게, 학력, 직업, 성격, 좋아하는 배우자상, 심지어 부모와 본인의 재산 까지도 파악해서 어떤 배우자가 좋을지를 고민하고 걸러서 수 십명 아니 수 백명을 만난 후 당사자들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이루어지는 결혼은 과연 현명한 선택일 수 있던가?
 

조지 오웰의 소설을 영화화한〈1964>에서 문제는 더욱 간단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I love you) 라고 맵시 없는 글씨로 쓰인 쪽지 한 장으로 사랑은 시작된다. 군중집회 속의 인파에 묻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서로 스쳐가며 맞잡은 손을 통해 10초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사랑은 확인된다. 이름도 정체도 모른 채 자기를 죽일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목숨을 담보로 한 믿음으로써 윈스턴은，’’당신 얼굴에 있는 무엇 때문에...당신이 그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줄리아는，그들의 사랑을 쟁취한다(빅 브라더의 시대에서 분명 사랑은 쟁취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 선택의 책임을 온전히 받아 들이는 우린 이미 죽은 사람 이야’’라는 완전한 절망 아래 슬픈 사랑을 지속한다. 하지만 사상경찰에 붙잡혀 철저한 인간성 유린과 극심한 좌절과 희망의 환멸 앞에 마지막 인간 윈스턴은 줄리아에 대한 사랑을 상실 (강압에 의한 탈취) 당하고 만다. 인간의 영혼이 말살된 시대에 목숨을 담보로 찾고 키워 온 그 처절한 사랑마저도 죽음을 고한다. 그러 나 나는 윈스턴의 사랑을 사랑한다. 비록 내일 종말을 고할지도 모를 사랑일지라도，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지켜낼 수 없는 사랑일지라도 우리는 사랑을 멈추거나 포기 해서는 안 된다 사랑하는 순간만으로도 진정한 사랑이다.
 

할머니는 행복했으리라 나는 믿는다 그러나 또한 그 시대의 다른 할머니들은 할머니와 같은 삶 때문에 불행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플랭클린의 시대에서도 어떤 결혼은 행복했을 것이고 어떤 결혼은 실패했을 것이다. 지금의 이 시대에서도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하다. 선택의 폭이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아무리 많은 선택이 주어진들 결국에는 둘 중 하나，아니 어쩔 수 없는 유일한 선택 앞에서도 여전히 우리는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선택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랑을 할 것인가를 선택 할 수 있다. 사랑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것임 에 틀림없다. 남의 사랑을 부러워하지 말자. 나에게는 나만의 사랑이 어울리는 법이다.

나는 가끔 대학병원구내식당에서 주는 대로 먹던，밥 위에 노란 계란이 덮여 나오던 정식(定食)이 그립다. 아직도 내게는 물회와 회덮밥의 선택이 어렵다. 그러나 비록 선택의 어려움이 있다 할지 라도 나는 다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이 아니다 옛날은 가고 사랑은 남는다. 그대요, 지금 이 순간 그대는 끊임없이 사랑할지어다.
 

임장섭 치 의학 박사 십 여 년간 부산대학교 치과대학 교수로 재직, 부산대학교병원 보철과 과장과 중앙기공실장을 역임하고, 20이년 교환교수로 독일 튜빙겐 치과대 학에서 임플란트와 특수정밀보철학을 연구하였다. 지금은 오딧 세이치과 대표원장을 맡고 있으며 부산 경남지역 치과의사들의 공부 모임인 Pusan Philosophic Rosthetics의 대표와 BADA forum(Busan Academic Dental Association)등을 이끌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임장섭 치 의학 박사 십 여 년간 부산대학교 치과대학 교수로 재직, 부산대학교병원 보철과 과장과 중앙기공실장을 역임하고, 20이년 교환교수로 독일 튜빙겐 치과대 학에서 임플란트와 특수정밀보철학을 연구하였다. 지금은 오딧 세이치과 대표원장을 맡고 있으며 부산 경남지역 치과의사들의 공부 모임인 Pusan Philosophic Rosthetics의 대표와 BADA forum(Busan Academic Dental Association)등을 이끌며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