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부산 매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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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영화부산 vol 04(통권 44호), BFC 뉴스. 2013년 2월 4일

영화제에서 우연히, 만나다

글 ·
작성일2020. 12. 15

창의성의 본질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때로 는 예기치 못한 영감이 홍수처럼 밀려온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특히, 같은 분야 전문가들의 교류보다는 각기 다른 분야의 사람들 간의 우연한 만남이 더 의미 있다. 예컨대, 비행기 안에서 생화학 연구자와 조각가가 나란히 앉아 대화를 시작한다면, 이는 그들이 각자의 일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런 관점의 변화 는 종종 창의적인 성과로 이어진다.

스티브 잡스는 샌프란시스코의 픽사 건물을 재설계할 때 이 같은 현상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던 듯하다. 애초에 픽사 건물은 세 부분으 로 나뉘어 컴퓨터 과학자들과 애니메이션 제작자들이 각각 한 부분 씩을, 감독과 시나리오작가와 창의적인 일을 하는 직원들이 나머지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잡스는 모든 직원이 각자 익숙한 영역에서 벗어나 서로 소통하도록 유도하고자 했다. 단순히 사무실 을 옮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상호작용을 이끌어낼 수 없었기 때문에 픽사 건물 중간에 단 두 개의 화장실만 두기로 했다. 직원들은 하 루에 서너 번 화장실에 가기 위해 10분에서 15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그다지 능률적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화장실로 가는 먼‘ 여정’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교류하며 생각을 나누는 기회의 장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영화제에 참석하는 또 다른 이유
영화 산업에서 영화제는 때로 그‘ 화장실로 가는 먼 여정’과 비슷하 다. 물론 영화제에 참석하는 일차적인 이유는 영화를 보거나(영화 평 론가나 프로그래머, 혹은 일반적인 영화 팬의 경우) 마켓 혹은 세미나 에 참석(기자나 영화 판매자, 투자자의 경우)하기 위해서지만, 솔직히, 영화제 참석자들의 실제적인 업무는 집에서 인터넷이나 전화로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제에 참석하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다른 참가자들을 만날 기회를 원하기 때문이다. 영화제란 이미 아는 사람들 과 토론을 나눌 수도, 누군가를 처음 만날 수도 있는 공간이다.

모든 사람이 영화제 참석의 사교적 측면을 이해하고 있지만, 영화제 측에서 발행하는 보도 자료나 기자들이 쓰는 영화제 종합 기사 속에서 는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반면 영화업계 전문가들끼리 대화할 때는 영화제의 사교적 분위기가 영화제들 간에 어떻게 다른지 진지하게 비 교하고 토론한다. 제작자가 평론가나 투자자, 혹은 영화제 프로그래 머를 쉽게 만날 수 있는 영화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어렵고 영화 계에서 각기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교류하기도 쉽지 않은 영 화제보다 훨씬 효용성이 있다.

크루아제트 거리

영화제의 장소성과 공간구조
영화제의 사교적 분 위기와 우연한 만남이 일어날 가능성에 영향 을 미치는 요소는 다양 하다. 우선, 영화제 장 소의 물리적 구조를 꼽 을 수 있다. 물론 영화 제 조직위원회는 거리 나 상영관 위치를 결정할 권한이 거의 없다. 또한, 잡스처럼 화장실 위치를 두고 무리한 실험을 감행하라고 선뜻 조언하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제 장소 내의 동선이, 영화제 사람들과 초청자들이 교류 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분명하다‘. 크루아제트’로 알려 진 칸의 긴 해변로는 여러 가지 이유로 유명한데, 근처에 늘어선 수많 은 고급 호텔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칸 영화제에 참석해 본 사람이 라면, 양 끝을 관통하는 그 길에서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나게 된다는 점을 알 것이다. 평소 5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아는 사람들을 만나거나 처음 만나는 이를 소개받게 되면서 훨씬 오래 걷게 되기도 한다. 물론 효율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칸 영화제의 강 점이다. 일부 영화제에서는 산업계 초청자들 따로, 평론가와 프로그 래머 따로 각기 다른 장소에서 모이는 반면, 칸에서는 이런 단절 현상 이 완화된다.

건물의 인테리어 역시 영화제 참가자들의 경험에 놀라운 영향을 미 친다. 건축가들이 잘 알고 있듯, 방과 복도를 어떻게 설계하는지에 따 라 방문객이 그곳에 오래 머무를 수도, 반대로 스쳐 지나갈 수도 있 다. 영화제 조직위원들은 현대적이고 편안한 환경에서 영화를 상영하 는 데에 신경을 쏟기 마련이다. 결국 대부분의 영화제 상영은 복합상 영관에서 이루어진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복합상영관들은 대체로 많 은 관객이 효율적으로 빠르게 드나들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달리 말하자면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이 주변에서 영화에 대한 감상을 이 야기하기 좋은 구조가 전혀 아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 참가했던 몇몇 초청자들은 영화의전당 내 상영관에 대해 불평하기도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널찍한 게스트 라운지 등 영화의전당 앞과 내부에 자리한넓은 공간을 아주 좋아한다. 영화제에 온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 기 쉽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문화가 더해지는 정서적 공감
영화제 참가자들은 부대 행사를 통해서도 서로 만나고 알아갈 수 있 다. 영화제에서 이런 일이 주로 일어나는 장소는 파티이다. 영화계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야 파티에 지나치게 힘을 쏟는 것이 유치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사실 파티는 영화제를 가치 있게 하는 인맥 형성과 정보 교환에 필수적인 행사다. 필름마켓 역시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위 해 모이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특히 벽이나 칸막이가 거의 없는 개방 적인 구조일 때 더욱 그렇다. 그러나 마켓의 경우, 영화 산업계의‘ 창 의적’ 측면과‘ 상업적’ 측면 간의 교류는 적은 편이다.

ACF(아시아시네마펀드) 파티

마지막으로, 개최국의 문화와 더불어 영화제 의 전체적인 분위기(영 화제의 규모, 격식의 정 도 등)가 영화제의 사교 적 측면에 끼치는 영향 력은 매우 크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유명 한 밤 문화는 한국에서 열리는 많은 주요 행사에 큰 의미를 더한다. 공식 파티 외에도 야식으로 파전을 먹거나 함께 노래방에 가는 등의 밤 문화를 통해 쉽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친해질 수 있기 때문이 다. 한국에서 축제에 참석한 초청자들은 행사와 더불어 이 점을 특히 기억한다

우연한 만남은 영화제 참가 경험의 큰 부분이다. 영화제 조직위원 회에서 이런 만남이 이뤄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어느 정 도까지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러한 노력 은 분명 유익할 것이다. 세세한 부분에서부터(영화제 측에 한 가지 바라건대, 부디 초청자 이름표에 큰 글씨로 이름을 써서 한눈에 알 아볼 수 있도록 해 줬으면 좋겠다.) 영화제 사무 국과 게스트 라운지의 배치 같은 큰 문제들 까지, 영화제 측에서 신경 쓸 수 있는 일 은 많고도 많다. 이를 통해 때로는 계획 적인, 때로는 우연한 만남이 더 많이 이 뤄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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