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댄스영화제 창설자, 로버트 레드포드(Photograph by Chuck Foxen)

우연찮게 올해 제29회 선댄스영화제(1월 17일∼27일)를 일주일 일정으로 다녀왔다. 영화제 직전 14일부터 17일까지 선댄스인스티튜트와 파트너십으로 개최되는 아트하우스컨버전스(이하 컨버전스) 콘퍼런스에 패널로 초청받은 것이 그 계기였다. 난생처음 찾은 선댄스 영화제를 전격 맛보기 전, 컨버전스에 참석한 것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머물터. 무엇보다 15일 저녁(현지 시각) 로버트 레드포드를 지척에서 바라보며, 70대 후반의 고령이란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활력 넘치고 인상적인 ‘옹’의 스피치를 들을 수 있어서였다. 로버트 레드포드가 누구인가? 미국이 낳은 거대한 스타·배우(<내일을 향해 쏴라>(1969), <스팅>(1973) 등)이자 위대한 미국인으로 선댄스 영화제를 창설한 주인공 아닌가!
 

선댄스영화제와 한국영화
선댄스영화제는 1970년대 중반 로버트 레드포드가 유타주 솔트레 이크시티에서 열리던 이름 없는 영화제를 후원하면서 출발했다. 그는 <내일을 향해 쏴라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에서 자신이 맡았던 배역 이름을 따서 선댄스인스티튜트를 설립하고, 1985년 미국영화제(The United States Film Festival)를 흡수하여 선댄스영화제를 출범시켰다. 매년 1월 미국 유타주 파크시티를 중심으로 열린다. 영화제는 워크숍, 세미나 등의 프로그램을 통해 영화 관련 예술가, 감독, 시나리오 작가 등을 발굴 및 후원하는 선댄스 협회 활동 중 하나. 1989년 발굴한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가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쥐면서 세계적 영화제로 급부상했다. 그 밖에도 <바톤 핑크>의 코엔 형제, <저수지의 개들>의 쿠엔틴 타란티노 등 많은 젊은 감독들을 배출했다. 1999년 초저예산 영화 <블레어 위치>는 세계적 박스 오피스 히트작이 됐다.
 

한국 장편 극영화로는 1996년 박철수 감독의 <301·302>가 처음으로 이 영화제의 월드 시네마 섹션에 선정되어 화제를 모았다. 다음 해 박철수 감독의 <학생부군신위>가 또 초청되었다. 그 이후 2000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이명세), 2001년 <섬>(김기덕), 2004년 <바람난 가족>(임상수), 2005년 <녹색의자>(박철수), <여자, 정혜>(이윤기), 2006년 <피터팬의 공식>(조창호), 2007년 <아내의 애인을 만나다>(김태식), 2010년 임우성 감독의 <채식주의자>, 그리고 올해 월드 시네마 드라마 부문 심사위원 대상을 차지한 오멸 감독의 <지슬>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한국 영화들이 공식 초청됐다. 이 영화 중 본상 수상을 한 건 <지슬>이 최초다. 다큐멘터리로는 2006년 <송환>(김동원), 2009년 <워낭소리>(이충렬)가 월드 시네마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 초청된 바 있는데, <송환>이 특별상에 해당하는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했다(이상 네이버 지식백과사전 등 참고).
 

컨버전스 콘퍼런스에 참석해 능숙하지 못한 영어로 미국 아트하우스 영화에 대한 외국인의 시각 등에 대해 사회자의 진행에 맞춰 다른 두 패널과 1시간 20분 가량을 말하며 버텨낸 것 또한 올 선댄스를 잊지 못하게 할 강렬한 추억이다. 상상해보라. 미국 각지에서 모여든 수십 명의 영화 배급 및 상영업자들 앞에서 잘 안 되는 영어로 사회자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 낯선 외국인의 풍경을. 우스꽝스럽지 않은가? 인상적이지 않은가?
 

아트하우스 컨버전스 콘퍼런스(Photograph by Chuck Foxen)

영화 Q&A 중심의 영화제
콘퍼런스를 뒤로 하고, 17일 영화제 개막식에 참석, 개막작을 관람하고 Q & A까지 지켜본 뒤, 개막 리셉션에 들른 것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세계 최고, 최대의 독립영화축제답게 지독히도 북적거렸던 리셉션이야 그러려니 치자. 일찍이 들어본 적조차 없었던 선댄스 개막식은 그야말로 속전속결이었다. 그만큼 단촐하고 소박했다. 우선 그간 체험한 세상의 숱한 영화제들이 하기 마련인 개막 선언조차 하질 않는다. 집행위원장은 커녕 조직위원장조차도 무대에 오르질 않는다. 수석 프로그래머가 등장해 간단한 인사를 전한 뒤 바로 개막작의 주역인 감독을 소개한다. 그리고는 영화 상영과 뒤이은 Q & A. 개막작 상영 후 Q & A를 하다니, 선댄스의 첫 번째 충격이었다. 하긴 Q & A 야말로 선댄스의 오늘을 가능케 한 결정적 덕목 아닌가? 부산국제영화제가 그랬듯…….
 

별도의 개막작이 따로 없이, 월드 시네마 드라마 부문 경쟁작 중 하나인 <크리스탈 페어리>를 개막작으로 선정, 선보인 것도 인상적이긴 매한가지다. 칠레 출신 친구들과 칠레를 여행 중인 이십 대 남자 주인공 제이미와 불현듯 어디선가 나타나 그들과 같이 지내다 홀연히 사라지는 한 여 주인공 크리스탈 페어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통쾌하면서도 통렬한 코믹 성장 드라마. 뉴욕에 기반을 두고 활동 중인 칠레 출신 감독 세바스티안 실바는 언뜻 평범하게 비치는 성장담을 통해, 미국(인) vs 칠레(인)의 확연한 대비를 보여준다. 그로써 양국의 문화 차이를 제시할 뿐 아니라 제이미 캐릭터를 통해 미국의 천박한 세속적 자본주의에 메스를 가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 메스질이 달콤 쌉싸름 하다. 감독은 심야상영(Park City at Midnight) 섹션에서도 또 한 편의 성장 영화 <매직 매직>을 선보였다.
 

줄서기 시스템은 선댄스의 또 다른 힘
Q & A와 더불어 선댄스영화제의 위상을 증거하는 또 다른 요소는 다름 아닌 웨이트리스트를 통해 티켓을 구입해 영화를 보게 하는 시스템이다. 그것은 선댄스영화제와 친해지려면, 줄서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사실을 함축한다. 프레스 & 인더스트리 스크리닝도 예외는 아니다. 지정좌석제인 부산국제영화제와는 달리, 선댄스영화제는 일반적으로 선착순 입장을 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줄을 서서 표를 구해 영화를 보는 것이 못마땅하거나 불쾌하다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미리미리 서둘러 인터넷이든 현장에서 15달러를 지불하고 표를 구하든가, 아예 선댄스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 둘 다 아니라면, 줄서기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선댄스 영화제야말로 세계 최고의 영화제로서 손색없다. 조금만 부지런을 떤다면 자기가 보고 싶은 영화는 볼 수 있는 확률이 높기에 하는 말이다.
 

나는 두 편을 웨이트리스트 티켓을 통해 관람했다. 뉴프론티어 섹션의 <팻 셰이커>(무하마드 쉬르바니, 이란)와, 미국 드라마 경쟁 부문의 <뇌진탕>(Concussion, 스테이시 페이슨)이다. 18일 낮 <팻 셰이커>의 웨이트리스트 표는 상대적으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영화 시작 1시간 반쯤 전, 이집션씨어터 앞으로가 대기 번호 29번을 받았다.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 30분 전에 줄을 서서 기다리다, 현장에서 15달러를 주고 표를 구입해 입장했다. 어렵게 들어간 것에 비해 극장 안은 비교적 여유 있었다. 거의 만석에 가까웠지만 빈 좌석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에 비해 19일 낮 <뇌진탕>을 볼 때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여야만 했다. 2시간 전에 가는게 일반적이나 혹시 해 좀 더 빨리 2시간 15분 여 전에 갔더니 전날에 비해 줄이 두 배는 더 길었다. 순번도 50번 대였고, 혹시나 못 보면 어쩌나 내심 염려하지 않은 건 아니나, 기우였다.
 

웨이트리스트 표를 통한 영화 보기는 감사하게도 내게 유의미한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영화 평론가로서,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영화 선생으로서 그동안 내가 너무 쉽게 영화를 봐왔다는 각성 내지 반성이었다. 어떤 영화인 줄도 모르고, 호기심에서든 시간이 맞아서든 어렵사리 골라 본 영화들이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불만스러워하기란 어려웠다. 해당 영화를 보기 위해 바친 시간과 돈이 결코 만만치 않아서였다. 위 두 영화도 마찬가지다. 뭐 대단한 걸작은 커녕 수작이라고 하기에도 주저스럽지만, 흥미진진한 영화 체험으로 오랜 세월을 나와 함께 할 공산이 크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펼쳐 지는 아버지와 아들 간의 관계의 드라마(<팻 셰이커>)와 교외에 살던 부유한 40대 레즈비언 주부가 아들이 던진 야구공에 머리를 맞은 후, 도시로의 일탈을 꿈꾸는 휴먼 드라마(<뇌진탕>).
 

이미 짐작했겠지만, 이번 선댄스에서 많은 영화를 보진 못했다. 시간 관계상 중간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제인 캠피언 & 가쓰 데이 비드 공동 감독의 <탑 오브 더 레이크>(프리미어 섹션)까지 포함하면 기껏해야 7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올 선댄스에서 월드 프리미어된 프리미어 섹션의 <스토커>(박 찬욱)다. 어느 기자의 인터뷰 요청 때 밝혔듯, <스토커>를 향한 현지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뜨거웠다. 내게 보인 몇몇 이들의 감상평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현장에서 만난, 뉴욕 베이스의 한 영화 감독은 박찬욱의 결정적 멘토인 히치콕보다 더 낫다는, 다소 과장 섞인 극찬을 하기도 했다. 국내 반응 역시 크게 다를 것 같진 않 다. 비평적으로나 흥행적으로나. 박찬욱은 과연 ‘월드 클래스 스타 감독’다웠다.
 

선댄스, 한국영화의 밤 (왼쪽부터 오멸 감독, 단편영화 김송이 감독, 박찬욱 감독)

영화제를 고민하게 하는 새로운 시선
선댄스영화제의 참맛은 영화에서만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부산이나 칸 등에서처럼 날마다 벌어지는 각종 파티에 초대받아 갈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다. 내가 선댄스를 갈 수 있게 해준 지인 덕분에 몇몇 파티들을 맛볼 수 있었다. 오렌지카운티 소재 채프먼대학이 주관한 부산 웨스트영화제 리셉션(20일 낮), <스토커> 프리머어 이후 20일 밤늦게 열린 ‘스토커 파티’, LA 영화진흥위원회가 주최하고 LA 한국문화원이 후원한, 21일 저녁의 ‘한국영화의 밤’, 그리고 22일 밤 어느 지인의 주선으로 가게 된, 선댄스 최고급 파티인 ‘셰프댄스’등이 그것들이다. 하지만 이 지면에서 상기 파티들에 대해 상술한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진 않는다. 다만 ‘스토커 파티’때 코앞에서 니콜 키드먼을 지켜본 것-그러나 사진을 찍자고 말할 용기를 내진 못했다, 어리석게도!-은 그야말로 평생 못 잊을 2013 선댄스의 크디큰 축복이었다고만 말하련 다. 이래저래 이번 선댄스행은 영화제에 대해 다시금 고민하게끔 하고 영화제를 향한 새로운 시선을 안겨준 뜻깊은 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