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추이무이

말레이시아 Malaysia
올해 여성영화인의 활약이 가장 활발했던 아시아 지역은 단연 말레이시아다. 말레이시아는 신진 독립영화의 예술적 영역이(산업적 영역은 또 다른 얘기다) 공고한 편. 그 중 핵심 여성영화인으로 탄추이무이를 꼽지 않을 수 없는데, 감독으로, 제작자로, 심지어 최근에는 작가로까지 독특한 예술세계를 확장해 가고 있는 그녀는 아미르 무하마드, 리우셍탓 등과 함께 말레이시아의 가장 중요한 독립영화집단인 다후앙픽쳐스를 이끌고 있다. 초기작인 <탄중 밀림의 나무 한 그루A Tree In Tanjung Malim>(2004) 나 <사랑은 이긴다Love Conquers All>(2006)가 세계적으로 호평을 받았고, 이후 제작 및 마케팅, 배급에 있어서도 독립영화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2013년 아시안영상정책포럼에 발제자로 참여한 그녀는 말레이시아 독립영화의 제작 및 배급 방식 등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비록 중국으로 건너가 지아장커와 함께 개발 중이던 장편영화는 계획과 달리 내년으로 미뤄졌지만, 대신 그녀는 <남쪽에서 온 편지Letters from the South>(2013)라는 이름의 옴니버스를 제작했다. 애초 <디아스포라와 고향Diaspora and Homeland>이라는 제목으로 공개될 예정이었던 만큼, 탄추이무이(말레이시아) 본인을 비롯해 차이밍량(대만), 아딧야 아사랏(태국), 미디 지(미얀마), 순코(싱가포르), 로이스톤 탄(싱가포르)과 같이 대만과 동남아시아 각국을 대표하는 중국계 감독 여섯 명이 메가폰을 잡고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담았다. <남쪽에서 온 편지> 는 2013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월드프리미어로 공개된 작품이기도 하다.
 

탄추이무이가 비교적 신진영화인에 속한다면, 말레이시아 출신으로 이미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로나 티는 중견에 속하는 여성 제작자라 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는 물론, 홍콩과 유럽까지 그 활동 범위를 넓 혀 ‘공동제작의 달인’으로 불리는 로나 티는 데뷔작 <날고 싶은 눈 먼 돼지 Blind Pig who Wants to Fly>(2008)만으로 단번에 인도네시아영화계의 신성으로 떠오른 에드윈의 두번째 장편 <동물원에서 온 엽서Postcards from the Zoo>(2012)를 제작했다.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여성영화인으로는 이다 네리나를 꼽을 수 있는데, 올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멜리사 알리아스, 바니다 임란, 소피아 제인 히삼 등 말레이시아 신인 여성 감독들과 함께 <여자 이야기Telling Women Stories>(2013)라는 옴니버스를 공동연출 및 제작했다. 점차 무슬림사회의 색이 짙어지고 있는 말레이시아를 향해 소리높인 여성의 의식과 저항을 다루고 있다.
 

<경유Transit>(2013)

필리핀 Philippines
올해 필리핀에서는 젊디젊은 신인 여성감독의 등장이 눈길을 끌었다. 바로 지난해 마닐라필름파이낸싱포럼에서 발표된 이후 2012도쿄탤런트캠퍼스와 올해 베를린탤런트캠퍼스에도 참가하며 기대를 모은 <경유> 의 한나 에스피아다. 지난해 공개했던 대학 졸업작품을 제외하면 한나 에스피아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이 작품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연출력을 자랑한다.

 

<경유> 스틸컷

필리핀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인 <경유>는 외국인 노동자의 가족 중 5세 미만의 유아들이 이스라엘 법에 의거, 연고도 없는 지역으로 강제 추방될지 모르는 현실 (2010년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유대국가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 자녀의 이스라엘 체류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는 정책을 말한다)을 조명하고 있다. 언뜻 이스라엘 정부의 입장에 대한 일침으로만 점철될 수 있었을 영화는, 오히려 이러한 정치적 긴장감이 공동체 구성원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주목한다. 동시에 ‘타갈로그어’로 대표되는 ‘필리핀성’을 잃고 스스로를 이스라엘인으로 규정하는 야엘을 통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다 종국에는 추방당해야 하는 어린이들의 정체성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기도 하다. 이제 겨우 이십대 중반, 약관의 나이에 이토록 ‘아시아적인’ 영화를 만들어내기 위해 수년간 자신이 속한 사회를 진지한 의식으로 관찰했을 감독의 지난 날에 존경을, 더 깊은 이야기를 보여줄 10년 후에 기대를 보낸다.

제니퍼 자오

대만Taiwan
남녀를 불문하고 허우샤오시엔, 차이밍량 등 거장의 계보를 잇는 신진 감독이 최근 대거 등장한 대만의 경우, 주목할 여성영화인 중에는 감독이나 제작자가 아닌 공공정책 부문 리더도 있다. 타이베이필름커미션의 제니퍼 자오 위원장이 그 주인공. 그녀는 대만 최초의 필름커미션인 타이베이필름커미션의 창립을 함께 한 원년 멤버다.
 

센트럴모션픽쳐스를 통해 <와호장룡臥虎藏龍>(2000)의 제작자로 널리 알려진 대만의 대표 프로듀서 슈리공과 함께 일하면서 영화산업에 발을 들여 놓은 그녀는 이후 영화잡지 필진, 예술영화상영관 건립, 홍보, 배급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경력을 쌓았다. 당시 영화촬영 지원정책이 전무했던 타이베이는 타이베이 101 빌딩에서 찍기로 되어 있던 할리우드영화 <미션 임파서블3Mission Impossible 3>(2006)을 대륙의 오리엔탈펄타워에 빼앗기는 뼈아픈 경험을 했고, 이에 타이베이 시(市) 문화부에서는 미국에서 공부 한 해외파이면서 대만영화산업에서 이미 숨은 실력자로 알려져 있던 제니퍼 자오를 영입해 국제공동제작에 특화된 데이터 베이스 구축, 지원신청 절차 간소화 및 장기로케이션 지원 제공 등을 목표로 하는 타이베이필름커미션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제니퍼 자오는 시장을 설득해 각 지역 관공서에 ‘해외 작품 촬영을 타이베이에 유치할 경우 얻을 수 있는 도시 효과’에 관한 편지를 쓰게 했고, 이는 성공적인 전략으로 받아들여져 현재 타이베이의 체계적 제작지원 시스템의 기반이 됐다. 2012년을 강타한 이안의 <라이프 오브 파이Life of Pi> 역시 제니퍼 자오 위원장을 필두로 한 타이베이필름커미션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현지에서 상당부분 촬영됐으며, 이후 공동제작 및 로케이션 촬영을 희망하는 해외 프로덕션이 급속히 늘어나는 추세다.
 

<타이베이팩토리Taipei Factory>(2013)

이전까지의 성과를 차치하고서라도 올 한해 대만영화계의 주요 성과 중 하나는 유례없는 칸국제영화제 감독주간과의 협력으로 탄생한 <타이베이팩토리>의 성공일 것이다. 대만과 이란, 칠레, 프랑스, 한국의 젊은 감독들이 팀을 이뤄 하나의 옴니버스를 제작하는 이 프로젝트가 타이베이 필름커미션에 의해 기획 및 주도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미 수차례 국제공동제작을 진행하고 지원해 본 타이베이필름커미션의 지난 행보가 해당 프로젝트의 디딤돌이 됐다. 단순히 로케이션을 지원하는 행정기구로서의 역할을 넘어, 이처럼 지역영화산업의 질적 수준을 끌어올리는 프로젝트는 제니퍼 자오 위원장의 지난 경험과 국제적 역량이 필수 요소였다는 평가다. 6년이 라는 짧은 시간동안 타이베이 시의 문화·경제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대만영화에 대한 세계의 주목을 이끌어내는 등의 독보적 활동 내용을 인정한 타이베이 시는 조만 간 타이베이필름커미션의 역할과 기능을 더욱 확장한 타이베이필름카운슬 출범을 계획하고 있다. 물론, 제니퍼 자오 위원장이 변함없이 수장을 맡는다.
 

이외에도 싱가포르필름커미션을 시작으로 싱가포르단편영화제, 플라이-바이-나이트비디오챌린지 등 싱가포르 내 주요 단편영화제의 창립멤버를 거쳐 현재 단편영화제작·배급사인 오브젝티프스를 운영하고 있는 여성제작자 유니 하디(2013년 칸국제영화제 황금카메라 수상작인 안소니 첸의 <일로 일로Ilo Ilo>를 제작했다)와 데뷔작 <거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The Mirror Never Lies>(2011)의 압도적인 미장센으로 기대를 모은 후 현재 소포모어를 준비 중인 인도네시아 독립영화계의 여성 기대주 카밀라 안디니 역시 주목할 만하다. 과거 상당기간 동안 종교적·사회적 이유로 여성의 지위가 낮거나 사회 활동이 제한되어온 동남아시아에서 영화를 통해 약진하는 여성들의 활약상을 보는 건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들이 2014년에도 연출, 제작, 정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