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을 상징하는 영화제를 하나 꼽으라면 단연 반세기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금마장을 떠올린다. 타이베이영화제는 바로 그 금마장의 대안으로 1998 년 시작되었다. 규모나 인지도면에서는 아직 금마장에 다소 덜 미치지만, 11 월에 개최하는 금마장보다 이른 6~7월 개최를 통해 발 빠르게 새로운 영화를 소개하고, 신인감독들의 다양한 작품을 상영하는 장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영화제로 볼 수 있다. 매년 약 40여 개국 160여 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타이베이영화제는, 대만 내 외화배급사들이 가장 발 빠르게 해외신작을 발견할 수 있는 장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13년에는 약 서른 편에 달하는 해외작품이 타이베이영화제에서 상영된 후 대만 배급사와 극장배급 계약을 체결했다고 알려졌다.
 

인터내셔널 뉴탤런트 섹션
감독의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장편연출작만을 출품 대상으로 제한하는 인터내셔널 뉴탤런트 섹션은 부산국제영화제의 뉴커런츠 섹션과 마찬가지로 신인상에 해당하는 경쟁부문이다. 이 경쟁부문은 2007년 신설되어 올해 7년째 를 맞는데, 출품 및 수상작을 대만이나 아시아로 제한하지 않고 출신지와 관계없이 모든 신인감독에게 가능성을 열어두는 부분경쟁부문을 운영하는 영화제는 대만에서 타이베이영화제가 유일하다. 역대 아시아권 수상자 중에는 오늘날 대만의 대표 영화인으로 자리 잡은 웨이더솅(위덕성), 2010년 수상 당시 대만의 유망주였던 호위딩(하위정), 태국독립영화 뉴웨이브의 2세대로 각광받는 아딧야 아사랏, 지난해 <실혼失魂>(2013)으로 화제가 되었던 청몽홍 (종맹굉)과 최근 젊은 대만영화인의 선두주자로 올라선 창롱지 등이 있는데, 이 정도면 신인을 알아보는 타이베이영화제의 안목은 꽤 신빙성이 높지 않은가, 생각한다. 올해 인터내셔널뉴탤런트 섹션에 초청된 열두 편의 영화 중 아시아영화는 총 다섯 편(호주 감독이 연출한 호주-싱가포르 공동제작 1편제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오랜 파트너 편집감독 출신이자 지난해 부산 국제영화제 뉴커런츠 섹션을 통해 관객을 만났던 리 차타메티쿨(태국)의 <콘크리트 클라우드Concrete Clouds>(2013), 대만에서 20년 이상 촬영감독으로 활동해 온 치엔샹(전상)의 첫 장편극영화 연출작 <회광소나타> (2014), 타이베이영화제의 단골손님인 창롱지의 두 번째 장편 <공범> 등과 함께 한국의 이용승이 연출한 독립영화 <10분>(2014)도 소개된다. 가장 기대되는 작품은 지난 3월 홍콩국제영화제 신인감독 경쟁부문에 초청 받았던 치엔샹의 <회광소나타>로, 대륙에서 일하는 남편과 집을 떠나버린 반항아 딸을 둔 여주인공이 병든 시어머니를 돌보다 남모르게 옆 병상의 남자를 간호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이기다. 눈을 다친 남자를 통해 자신이 아직 생명력 넘치는 여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여주인공 링의 욕망과 외로움을 다룬 수작이라니, 아빈 첸과 창롱지 이후 대만에서 다시 한 번 눈여 겨볼 신인이 등장한 모양이다.
 

2014타이베이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창롱지(장영치)의 신작<공범共犯>(2014)의 스틸컷

타이베이영화제가 사랑한 창롱지
웨이더솅 이후의 대만영화를 이야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젊은 감독 중 하나는 바로 창롱지다. 창롱지의 경우 타이베이영화제가 ‘키워낸’ 영화인이 라는 이미지가 강한 편인데, 연출 데뷔작인 중편 <터널의 끝天黑>(2008)이 최우수 단편상을 수상한 데에 이어 첫 장편 <빛의 손길逆光飛翔>(2012)은 관객 상을 받았고, 작년에는 타이베이필름커미션이 제작한 국제공동제작 프로젝트인 옴니버스영화 <타이베이팩토리Taipei Factory>(2013)의 공동연출자로 폐막식을 장식하기도 했다. 올해 타이베이영화제는 창롱지의 두 번째 장편 <공범>의 월드프리미어로 개막한다(인터내셔널뉴탤런트 섹션에서 신인상을 두고 경합을 벌이는 작품을 개막작으로 초청한다는 발상이 놀랍다). <공범>은 이미 제작단계에서부터 여러 프로젝트마켓에 나왔던 작품으로, 시놉시스에 의하면 한 소녀의 죽음을 목격한 세 명의 고등 학생이 이 미스터리한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결국 각자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알게 되고, 자신들이 그 사건의 공범이어왔음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중·장편, 다큐·극영화를 불문하고 창롱지의 전작들은 과감함보다는 섬세함으로 어필한다는 공통점을 드러내왔는데, 사실상 스릴러적 요소를 배제할 수 없었을 <공범>은 어떻게 연출했을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이베이영화제가 금마장을 포함한 중화권의 많은 영화제-예컨대 본토의 상하이나 베이징에 비해 비교우위를 가지는 점은 무엇일까. 출범 당시 스스로 천명했듯, ‘중국어권 영화를 폭넓게 소개’한다는 취지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몇 년간의 타이베이영화제의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어딘가 결정적인 아쉬움이 눈에 띄는데, 경쟁작이나 개폐막작으로 초청 되는 대만 외 타 중국어권(대륙, 홍콩, 싱가포르 등) 영화의 상당수가 전년도 부산국제영화제나 같은 해 홍콩국제영화제를 통해 이미 공개된 작품이라는 점이 한몫하는 듯하다. 프로그램 팀이 이들 국가에서 제작된 새로운 영화를 발굴하는 속도가 한 발 늦거나, 혹은 상대적으로 소홀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타이베이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들이 일관된 정체성 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작가적 상상력이나 신진감독군의 참신함을 주된 관심사로 한다든지, 독립영화적 미덕을 갖춘 작품들을 공격적으로 소개한다든지 하는 ‘콘셉트’가 확고하지 않다는 의미다. 물론, 중국과 대만의 관계가 특수하고 미묘한 탓에 눈치를 봐야 하는 어려움도 있을 테다. 예컨대 현대 중국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자장커(가장가)나 로우예 (루엽) 같은 소위 ‘지하전영(地下電影)’ 영화를 좀체 초청하지 않는 것도 아마 영화제의 프로그래밍이 중국 대륙에 대한 대만 전체의 입장을 상징하는 듯 오해받을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런 예상이 크게 틀리지 않는다면, 타이베이영화제에 필요한 것은 프로그래밍의 자유일 듯싶다. 거의 타이베이시 당국의 예산으로만 운영되는 타이베이영화제가 그 자유를 온전히 확보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이야기지만.


중산당에 위치한 차이밍량(채명량) 커피숍, 시간이 멈춘 듯한 복고풍의 인테리어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소품들이 인상적이다

여름날의 타이베이
여름날의 타이베이는 감성적인 곳이다. 영화를 좋아하고, 영화제를 찾는 사람에게 는 더욱 그렇다. 아담한 상영 관에서 젊은 대만감독 특유의 서정성이 깃든 영화를 보고, 허우샤오시엔의 시네마 테크에서 또 영화를 본 후, 동명의 영화에서 이름을 따 온 카페 뤼미에르에서 더위를 식힌다(2호점은 카푸치노가 일품이다). 중산당에 위치한 차이밍량 커피 숍에서 <안녕, 용문객잔不見不散>(2003)의 벽걸이 포스터 아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기다리다 보면 한 번쯤은 자신의 커피숍을 찾은 차이밍량을 만날 수 있다. 지난해 탄추이무이, 아딧야 아사랏, 미디지 등 <남쪽에서 온 편지 Letters from the South>(2013)에 참여한 감독들이 타이베이영화제 기간 중 회동을 가졌던 곳도 바로 이 커피숍이었다. 이렇듯 영화인들이 모이는 공간은 물론이고, 타이베이필름커미션 웹사이트에 매달 소개되는 <도심 속 촬영지Sets in the City>를 눈여겨보면 <말할 수 없는 비밀不能說的秘密>(2007) 속 진리대학이나 <타이베이 카페스토리第36個故事>(2010)에 등장한 카페 등 소소한 영화 촬영지도 마주할 수 있으니, 영화제 기간 동안 타이베이의 곳곳은 말 그대로 아주 영화적인 공간이 된다.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 여름 냄새를 느끼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타이베이영화제를 기대하게 되는 이유다. 올해 타이베이영화제는 6월 27일부터 7월 19일까지 개최된다.